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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책주의 vs 파탄주의
유책배우자란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유책배우자에게도 이혼청구권을 인정할 것인가 여부는 각 나라마다 입법례가 다릅니다.
유책배우자는 이혼청구를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유책주의’라고 하고, 유책배우자에게도 이혼청구권을 인정하는 사상을 ‘파탄주의’라고 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은 이혼에 있어서 파탄주의를 채택하여, 혼인관계가 사실상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면 유책배우자라 하더라도 혼인관계 파탄을 이유로 이혼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2. 우리 민법은 유책주의인가 파탄주의인가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어떨까요?
민법 제840조는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이혼사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840조(재판상 이혼원인) 부부의 일방은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3.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4. 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6.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위 민법 제840조를 읽어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원칙적으로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의 귀책사유가 있어야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840조 제6호에서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에도 이혼청구권을 인정하고 있어, 유책배우자라 하더라도 민법 제840조 제6호 사유를 들어 ‘더 이상 혼인을 지속하기 어려움을 이유로’ 이혼청구를 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위 제6호 사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마치 우리 민법에도 파탄주의가 적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학자들의 의문이 있어 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은 민법 제840조의 해석을 두고 ‘원칙적으로는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은 인정되지 않으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인정될 수 있다’라는 절충적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법원의 절충적 태도는 구체적 사안에 따라 결론을 달리할 수 있어 그때 그때 사안에 따라 적절히 형평과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법원의 판단에 따라 개별 사안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어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은 단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개별적 사안에서 법원이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을 예외적으로 인정한 사례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갔을 때 이를 인정하였던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예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인용한 사례 – 가출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되고 아이를 출산하였으나 아이의 치료 및 양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남편을 상대로 이혼을 청구한 사례
이번에 연구 대상인 케이스는 유책배우자가 이혼청구를 한 사례입니다. 사실관계는 이렇습니다.
두 부부는 슬하에 미성년 자녀 2명을 두고 있었는데, 평소 남편의 잦은 음주와 외박 때문에 혼인 생활이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혼 7년 차쯤에 참다 못한 아내가 가출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별거 생활을 하다가 피고의 간곡한 설득으로 다시 6년 만에 재결합을 하였으나 한 달 만에 다시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아내는 다시 가출하였습니다.
아내가 가출한 동안 두 자녀는 할머니와 아빠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내는 2번째 가출 이후 몇 년이 지나 새로운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고, 동거남 사이에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갓난아이에게는 선천적 장애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마지막으로 가출한 지 10여 년이 지날 무렵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혼소송이 시작되자, 조정기일에서 원고(아내)는 ‘동거남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선천적 장애가 있어 지속적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현재 이혼이 되지 않은 상태라서 아기를 자신의 자(子)로 가족관계등록을 할 수 없어 치료가 어렵다. 피고(남편)와의 혼인생활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난 상태이니 제발 새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와 양육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용서해 달라.’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고(남편)는 ‘아직도 자녀들이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고 피고도 원고와의 혼인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자녀들은 엄마의 출산 사실을 알지 못하니 동거남 사이의 자식은 동거남에게 맡기고 귀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4. 제1심 법원의 판단
이 사건의 제1심 법원은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혼인생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상태에 이른 점은 인정되나,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 데에는 잦은 음주와 외박으로 갈등을 야기한 피고의 잘못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파탄의 근본적이고 주된 책임은 갈등 극복을 위하여 최선을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미성년 자녀를 남겨두고 일방적으로 가출을 하고 결국 다른 남자와 실질적인 중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녀까지 출산한 원고에게 있다.
라는 취지로 원고의 이혼청구를 기각하였습니다.
소위 팩트폭격이라고 하죠. 제1심 법원의 판결은 비정한 어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5. 항소심 법원의 판단
제1심 판결에 불복한 원고는 항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소심 법원은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혼인관계는 심각하게 파탄되어 다시는 혼인에 적합한 생활공동체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고 원고에게 새로이 태어난 자녀를 버려두고 피고와의 혼인을 계속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어 (중략) 원고와 피고의 혼인관계는 민법 제840조 제6호가 정한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는 때’에 해당한다.”
고 하여 원고의 이혼청구를 인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항소심 법원은 어떤 점에서 원고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일까요?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법원이 얼마나 이 사건을 세심하게 바라보았는지 느껴질 정도로 여러 가지 관점을 하나 하나 다 짚어가며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문장의 호흡이 길어서 원문을 다 인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나름대로 쉽게 풀어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원고가 잘못한 것은 맞다. 피고와의 사이에 낳은 두 자녀가 무슨 죄인가. 그런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가출한 원고에게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선천적 장애를 가진 신생아를 보살피기 위해서는 원고의 자녀로 가족관계등록을 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그리고 법원이 원고의 이혼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억지로 원고와 피고가 재결합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럴 바에 차라리 원고의 이혼청구를 인용하고 신생아의 치료 및 양육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피고 사이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비를 지급하게 하여 이제까지 다하지 못한 모(母)로서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다.”
즉, 항소심 법원은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의 치료가 급선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 같습니다.
한편 항소심 법원은 직권으로 친권자 지정 및 양육비 지급에 관하여 판단하였는데, 남편인 피고를 미성년 자녀들의 친권자로 지정하고 원고에게 자녀 1인당 매월 30만원씩을 양육비로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원고에게는 가출 이후로 자녀들을 돌보지 않은 데 대하여 금전적인 책임이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6. 시사점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가 인용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인데, 이번 사례에서는 그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가 어느 정도 선에서 인정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데 좋은 판단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